제일항역의 박광현 회장

"우리나라 항공화물의 역사를 말한다면 당연히 한국항공화물(KAS)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지만, 항공화물의 면허 자체가 없었던 초기 항공화물 시절에 활동했던 8개의 선구 업체들 중 아직까지 현 업에서 활동 중인 당시 경영자를 찾는다면 제일항역의 박광현 회장이 최고일 것이다. 해상운송분야에 먼저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초기 우리 항공화물 포워더 업계에서 제일항역의 박광현 회장은 협회설립과 면허제 도입 그리고 전문 혼재사의 출범 등 많은 분야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가발수출산업이 호황을 구가하던 1968년 이후 70년 초기 우리 업계의 이야기를 박광현 회장을 통해 들어본다. "


제일항역이 항공화물 포워더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66년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항공화물업계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한용환 사장이 한국항공화물(KAS)을 통해서 왕성하게 활동중 이었으며, 그 외에는 대표가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 에어카고와 해운 선박회사면서 항공사업에 진출한 에버리트 기선(이동혁 사장)이 있었다.
우리 제일항역이 항공사업에 뛰어들고 나서는 세방여행과 대한통운, 그리고 반도 에어카고와 대영항공등이 진출하여 초기 이들 8개사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항공화물 업계를 자연스럽게 구성하게 되었다.
나는 1958년 극동해운에 입사하여 해상운송에 관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으며 1969년 이후에는 자랑 같지만 사내에서도 상당히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랐다.
당시 젊은 패기로는 나중에 대한민국 최대의 선박회사를 경영해 보고자하는 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적지 않은 선박회사 출신 직원들이 선박회사 오너의 꿈을 키우며 독립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심심치 않은 일이였으나 쉽지는 않았으며 1966년 독립을 결심하고 사표를 냈지만 촉탁형식으로 남아 달라는 회사의 요구가 있어 이른바 직파영업 형태로 독립회사를 꾸리기 시작했다.

극동해운에서 독립하면서 만든 것이 바로 제일선박인데 당시는 개인기업의 형태였다.
항공분야로의 진출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해운영업과 더불어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항공분야로의 진출은 당연했기 때문에 1966년 제일항공을 출범시키게 되었다.
이후 이들 2개 회사를 합쳐 1968년 정식으로 주식회사 제일항역을 출범시키게 되는데 회사 이름에 항역(航易)을 붙인 이유는 당시에 우리가 무역 관련 사업도 일부 했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포워더들중 '항역'이라는 상호는 훗날 서울에어카고를 인수한 이상영 사장이 잠시 서울항역이라는 상호를 사용했으며, 아라항역이 이를 사용, 아직까지도 이렇게 3개 사만이 '항역'을 상호로 사용한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초기 항공화물 사업은 앞서 이야기한 8개 회사가 서로 경쟁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영업을 했는데 역시 한용환 회장의 KAS가 가장 많은 실적과 영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 많지 않은 업체였지만 회사별로 희비가 극명하게 나타나곤 했는데 그 이유는 항공사 B/L(AWB)을 얻기가 무척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항공사들은 IATA대리점이 아니면 AWB를 주지 않았으며, 상당기간 영업실적을 쌓아야 겨우 B/L을 얻을 수가 있었는데 당시 대한항공 담당자였던 김두철(씨)의 이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에게는 하늘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포워더들이 힘들었던 것은 NON-IATA 대리점에게는 항공사들이 5% 커미션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아마도 반도에어카고와 대영항공이 무너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당시 KAS 와 세방이 제일 열심히 했고 실적도 높았으며, 그 다음에 우리 제일항역이, 그리고 에버리트는 해상운송에 주력했기 때문에 항공실적이미미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소 당시 활동했던 모든 포워더들은 너도나도 IATA 대리점을 따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때에는 지금보다도 IATA 대리점 되기가 더 어려웠다. 우리 제일항역이 제일 우선 순위로 IATA 대리점이 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IATA 대리점 자격을 취득하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시 NON- IATA 대리점이 IATA 대리점이 되기 위해서는 IATA 항공사와 거래 실적이 있어야만 했다. IATA의 극동지역 담당 항공사는 일본 항공사였는데 우리 제일은 다행히도 일본항공과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다.
특히나 상당량의 공급능력을 갖고 있던 노스웨스트 항공과 잠깐 선 B/L 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져 어려움을 겪었는데 일본항공이 많은 도움을 줘서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같은 좋은 관계 덕분에 우리 제일항역은 IATA 대리점 취득시에도 일본항공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을 수가 있었으며 다행히 최종심사를 하는 싱가포르의 IATA (극동)본부까지 서류가 제출되었다.
물론 제출 서류는 무척이나 복잡하고 많았으며 여러 가지 보증도 필요했었다.
회사 재정 상태증명은 물론이고 한국 내 상당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보증과 영업 실적 등등, 지금 기억으로 당시 제출 서류량이 웬만한 책 두께만큼 됐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여하튼 당시로서는 우리 제일도 여타 업체와 마찬가지로 IATA 대리점 취득이 회사의 사활을 결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울에서 결과를 기다리기 조바심이 나서 직접 싱가포르로 달려갔었다. 당시 싱가포르 IATA 심사 담당관은 일본인이었는데 서류를 훑어 본 뒤 뜬금없이 "너희 회사가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을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 당시 우리나라 포워더들이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한참을 난감해하고 있는데 다른 담당자가 "혹시 라이온스 클럽이나 로터리 클럽에 가입한 적이 있느냐 ?"는 질문을 하기에 "로터리 클럽에 가입했다"고 이야기를 하니 반색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무조건 '오케이'를 했다. 운이 좋았던지 싱가포르 출장이전에 다른 이유로 할 수 없이(?) 로터리 클럽에 몇 번 가본적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 제일항역의 IATA 대리점 취득에 1등 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IATA 대리점 취득 때와 같이 초기 우리 포워더들은 항공사들에게 많은 부분 도움을 받았고 우리나라 항공화물 시장의 육성을 위해서 많은 협조가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업무과정에서 항공사들에게 섭섭했던 점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제일 큰불만은 B/L을 수령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매일 5부씩만 B/L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것도 수령시간이 정해져서 1분만 늦어도 담당자들이 "내일 다시 오라"고 해 화물을 내보내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도 새롭다.
항공사와 운임정산은 지금처럼 15일과 말일에 2번씩 했는데 정산과정에서 문제점은 별로 기억에 나질 않는다.
당시 우리 제일항역은 대한항공과 노스웨스트, 일본항공, 그리고 영국항공을 통해서 케세이 퍼시픽과 거래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많은 분들이 기억에 남는데 아쉽게도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포워더들은 많은 고생을 함께 했는데 초기 우리 제일항역에는 송기옥을 필두로 김광호, 정신일, 서징호 등 인재들이 많았다.
특히 송기옥은 에버리트 출신으로 당시 우리 직원들에게 모든 업무를 직접 교육 시켰으며 많은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직원들에 대한 업무교육이랄까 여하튼 인재양성을 위해서 회사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자랑같지만 KAS 와 우리 제일항역이 가장 열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세한 것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실무자들은 교육자료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공부하고 외국항공사를 통해서 이것저것 수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발업체 전성시대...선 B/L 발행도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항공화물을 취급하던 1968년에는 우리나라 수출품인 가발이 전성시대였다. 기억으로는 70년 이후 스웨터 등 섬유가 항공수출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무역용 샘플이 전부였다.
지금과는 달라서 당시 수출화주들은 우리나라 경제수준이 미약해서 우리 만큼 많은 어려움 속에서 열심히 일했다.
우리 무역업체들은 자금 흐름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가끔은 지급어음을 연장해 달라고 우리 포워더들을 찾아온 회사들이 적지 않았다.
김우중 사장이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대우(전신 한성무역)도 우리에게 어음 연장 때문에 찾아 온 적도 있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웃음) 지금과 다른 것이 있다면 바로 선 B/L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열악한 무역업계의 사정으로서는 운송업체들이 우리들을 찾아와 선 B/L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우리 포워더들도 사고의 위험이 있었으나 고정거래처인 경우 많은 업체들이 선 B/L을 발행하고는 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말하는 선 B/L처럼 악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회사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 B/L을 요청한 업체들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생산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단지 공장을 돌리기 위한 자금조달로서 가끔 선 B/L을 요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운송업체들은 굳이 선 B/L을 발행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위험부담을 안고서도 이를 수락한 것은 우리나라 수출이 잘되기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무역업체들을 도와준다는 의미가 더욱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선 B/L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한 가지 공신양행 건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일 수도 있는데 우리 제일과 상당히 오랫동안 거래해 온 가발전문업체인 공신양행이 어느 날 갑자기 에버리트로 거래선을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공신양행 사장과는 친밀한 관계여서 몇 건의 선 B/L이 남아 있었기에 더욱 화가 났으며 전화로 심한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와 거래에서 남겨 놓았던 선 B/L건을 다 해결하고 나서는 에버리트와 거래하던 중 부도가 나버리고 말았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우리는 피해가 전혀 없었지만, 에버리트는 뒤늦게 거래한 업체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생각해보니 당시 공신양행 사장이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거래처를 옮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에버리트는 큰 회사이고 외국기업이니 좀 손해를 봐도 괜찮다는 생각을 공신 사장이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웃음)

가발 수출은 70년대 초반까지 우리 수출의 대명사였던 만큼, 당시 우리 항공 포워더들은 이렇듯 가발 수출업체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해서 전 직원이 운송의 모든 과정에 직접 참여했는데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시 우리 제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사장인 나를 포함하여 불과 6명이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했다.
지금 우리 제일항역이 130여명의 직원을 두고 외국에만 11군데의 지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이다. 당시 포워더들의 운송수단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요하다면 지게든 리어카든 동원하여 물건을 옮겨야만 했다. 우리 제일도 내가 업무용으로 쓰던 픽업용 화물차량 1대가 전부였다.
여하튼 화주가 싣고 오든 우리가 픽업을 해오던 가발 공장에서 박스에 담겨져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은 우리 회사가 있던 무교동 사무실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당시 우리 회사가 있던 무교동 금일빌딩은 2층이어서 직원들이 박스를 어깨에 매고 직접 옮겨야 했다. 도착한 가발을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으면 가발수출검사소직원이 우리 사무실로 와서 수출상품을 직접 검사해야만 비로소 공항으로 화물을 옮길 수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수출검사가 끝난 화물이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하는 일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라벨작업을 하고 B/L 발행하고 항공기에 기적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공항에서의 애로사항이라면 지금 국제선 제 1청사 옆 정도에 위치한 보세창고에 입고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이곳 보세창고에 사무실을 열기가 무척 어려워서 공항업무가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김포에는 당시 3곳의 보세창고가 있었는데 이들의 위세(?)가 항공사 못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항공사 스페이스가 나는 대로 가발이 채워져 나갔으니 호황은 호황이었던 시절이었다.
1968년 당시 기준으로 우리 제일항역은 항공으로만 많은 실적을 올렸는데 월간 1만 6,000달러(항공사 FLAT RATE기준)정도를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KAS는 월간 10만달러 수준으로 전체 업계가 월 20만 달러 정도를 했으니 엄청난 실적을 올린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우리 업계가 항공화물을 취급하던 초기에는 면허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 정부 기관의 지원이 전무했던 관계로 여기 저기서 홀대(?)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해서 업계사장단들은 1968년부터 교통부를 통해서 꾸준히 면허제 도입을 위한 법제정을 요청했으며 동시에 우리들의 권익 보호를 위하여 협회 출범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업계의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1970년 11월 교통부로부터 협회 설립에 대한 인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면허 문제도 해결되었다. 굳이 차례를 지킨 것은 아닌데 자연스럽게 면허 1호는 KAS가, 2호는 서울카고, 3호는 에버리트가 취득했으며 우리 제일항역은 4호로 네 번째가 되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협회 설립으로 초대와 2대의 회장에는 KAS의 한회장이 선출되었고 3대 회장은 에버리트에서 나왔으며 4대회장에는 내가 선출되어 회장도 4번째로 하게 되었다. 협회 출범과 면허제로 우리 업계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으며 면허 기준에 맞는 업체들이 후발로 진입하게 되는데 72년인가에 6-8개 업체가 회원사로 가입하게 돼었다. 기억나는 회사들을 보자면 게이트웨이, 동아항공, 해외항공, 아세아항공, 고려항공, 점보익스프레스 등등이 이들 업체들이었다.



당시 우리 업체들의 해외 파트너라는 것은 대부분 일본 업체들이었다. 일본이 해외 파트너로 각광(?)받게 된 것은 이른바 콘솔(혼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마도 우리 업계에 콘솔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우리 제일항역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외국의 여러 사례를 보니 무엇보다도 혼재를 통한 수익창출이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났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 품목의 형태도 그렇고 우리 포워더들의 능력도 그렇고 자체적으로 콘솔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많았다. 해서 내가 생각하길, 일본으로 혼재 가능한 물건을 보내서, 파트너로 하여금 혼재를 하여 미국 등으로 보내는 아이디어가 생각이 났다. 해서 당시일본항공의 소개로 일본측의 세이부 실무자가 방한, 우리와 일본 콘솔 방안을 협의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서 우리 제일항역은 당시 일본 세이부의 계열사였던 UAC(UNITED AIRCARGO CONSOLIDATOR)와 파트너 계약을 맺고 일본 현지 콘솔 서비스를 개시했다. 일본에는 이밖에 TAC(TOKYO AIRCARGO CONSOLIDATOR) 와 JAC (JAPAN AIRCARGO CONSOLIDATOR) 및 NEC등이 콘솔 서비스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KAS 는 TAC와 파트너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일본 현지 콘솔은 제한적일 수 밖에는 없었고 우리 업체들에게도 그리 큰 이익을 가져다 주질 못했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해도 일본 현지 콘솔은 일본업체들만 유리한 것이어서 72년 이후 차라리 우리도 혼재사를 만들어 영업을 해보자는 방안을 내고 업계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교통부로부터 전문혼재사 면허를 받도록 일을 추진했다.
면허제 이후 진출한 업체들을 크게 3그룹으로 나누어 3개의 전문 혼재사를 설립하는 방안이 이때 구상되었으며, 마침내 1975년 교통부가 다음해(76년) 7월까지 5개사 이상이 혼재 그룹 3개에 대해 신청을 하라는 공문을 받게 되어 탄생한 것이 세계혼재( WAC), 범한혼재(PKC), 대한혼재(DAC) 등 3대 혼재사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항공화물업계는 전문혼재사와 일반대리점이 함께 시장을 구성하는 현대 모습의 틀을 갖추어 나갔으니 이때가 1976년이다.



마지막으로 해외파트너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활동중인 유수의 외국계 포워더들과는 제일이 모두 한번씩은 파트너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내 성격은 외국 기업에 종속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서 이들과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들 외국기업이 이익을 많이 챙기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국제화, 세계화 등 이른바 글로벌 시대에 무슨 전근대적인 생각이냐고 비난할지는 몰라도 나는 여전히 싫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도 외국 포워더들은 한 마디로 자신들의 말을 잘 따르는 업체들을 선호했다. 자연히 나를 포함한 우리 제일항역이 거북스러웠을 것이다. 오죽하면 그들에게 ANTI-FOREIGNER 란 말까지 들었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하고 해외 지사 설립(네트워크확장)에 보다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네 정서상 해외지사 설립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키웠던 직원이 배신하기 일쑤고, 투자한 만큼 효과도 별로다. 그러나 해야하고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68년 우리가 1만달러를 벌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달러가 아까워서라도 외국업체들이 우리 시장에서 잘되는 것은 보기가 싫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자, 전체 시장에서 외국 포워더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해마다 늘고 있다. 사실상 외국업체들이 독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 업계에 젊고 똑똑한 후배님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 시장을 지키려는 노력을 경주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요즘은 너무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경쟁도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대 고객 서비스에 철저를 기하라는 조언도 하고 싶다.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하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군대에서 상급자의 지시에 복창을 하고 행동에 옮기듯이 고객의 말에 복창하는 기분으로 서비스에 임해야 할 것이다.